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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지옥이다 (고시원이라는 감옥, 불안이 만든 괴물)

by luby0211 2025. 7. 14.

타인은 지옥이다 영화 포스터

《타인은 지옥이다》는 단순한 고시원 공포물이 아니다.
이 작품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좁은 고시원을 배경으로, 한 청년이 점차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심리적으로 침식되고 붕괴되는 과정을 그리는 정교한 심리 스릴러다.

주인공 윤종우는 사회 진입 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20대 후반의 청년이다. 글을 쓰기 위해 상경했고, 임시로 고시원에 들어가게 되며, 이상한 이웃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그 이웃들은 단지 기이한 ‘타인들’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불안, 그리고 종우 자신의 내면에서 증식하는 감정이 결국 지옥을 만들어낸다.

이 글에서는 ① 고시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구조적 불안② 불안이 인간을 어떻게 분열시키고 타인을 괴물화시키는가라는 두 가지 핵심 축을 중심으로 《타인은 지옥이다》를 깊이 있게 분석해 본다.

1. 고시원은 왜 지옥이 되었는가: 공간이 주는 불안과 심리적 감금

《타인은 지옥이다》의 주 배경인 '에덴 고시원'은 물리적으로 좁고 닫힌 공간이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고시원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물'이자, 도시 사회가 만들어낸 심리적 감옥이라 할 수 있다.

좁은 복도, 얇은 벽, 서로의 기척이 끊임없이 느껴지는 구조. 이 고시원의 구성은 타인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는 구조다. 벽 너머에서 들리는 코 고는 소리, 끓는 냄비의 소리, 누군가의 신음소리, 낮은 대화… 그 모든 것이 윤종우의 ‘불편함’을 자극하고 점점 감각 과민화 현상을 유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시원이 만들어낸 이 감정적 환경은 현대 도시가 개인에게 제공하는 '고립된 공동체'의 축소판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각자의 방에 있지만, 그 벽은 결코 두껍지 않다. 우리는 고립되어 있지만, 진정으로 혼자일 수는 없다. 그 애매한 거리감은 오히려 더 큰 긴장을 낳는다.

이 구조는 현대 도시에서 느끼는 인간관계의 핵심 불안과도 맞닿는다. ‘관계 맺기는 싫지만, 완전히 고립되기도 무섭다’는 이중적 욕망. 고시원은 그 욕망이 충돌하는 장소다. 따라서 《타인은 지옥이다》에서의 고시원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불안이 살을 붙이고 실체화되는 공간이다.

2. 불안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감정은 내부에서 지옥을 만든다

처음 고시원에 입주했을 때, 윤종우는 다른 이웃들을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들은 점점 그를 감시하고, 말을 걸고, 따라다니고,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그들로부터 위협받는다고 느끼고, 점점 더 경계심을 드러내며, 결국 이들과의 관계에서 정상적인 소통 자체를 포기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단지 외부 자극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종우는 처음부터 도시에서 낯선 공간과 타인에 대한 불신과 피로를 안고 있었다. 그 불신은 고시원이라는 밀실 공간 안에서 증폭되며, 일상적인 사람들을 '위협적인 타자'로 왜곡해 나간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과잉 일반화'와 '내면화된 감정 투사'에 해당한다. 즉, 불편함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을 자기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할 때, 인간은 그 감정을 외부 세계에 투사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보통 나보다 '다른' 외형을 가진 타인이다.

고시원의 주민들은 누군가에겐 단지 내향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종우에게는 그들이 '괴물화된 타자'로 인식 된다. 그는 그들의 표정, 말투, 발소리 하나하나를 과장하여 해석하고, 점점 '나는 공격당하고 있다'는 믿음에 갇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는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선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묻는다:
“그들이 정말 괴물이었는가, 아니면 내가 그들을 괴물처럼 보기 시작한 것인가?”

3.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감정의 구조다

작품 제목 ‘타인은 지옥이다’는 사르트르의 희곡 『출구 없는 방』에서 따왔다. 원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옥은 불구덩이나 고문실이 아니다. 지옥은 타인의 시선이다.

그러나 드라마 속 종우는 이 문장을 뒤집는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기보다, 자신의 시선을 통해 타인을 지옥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지옥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인식한 나’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고시원이라는 공간, 타인의 기척, 타인의 말투, 타인의 습관. 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는 해가 되지 않지만, 내가 그것을 위협으로 해석하는 순간, 지옥은 만들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는 ‘현대인의 불안 구조’를 매우 집요하게 시각화한 드라마다. 관계는 피로하고, 사람은 의심스럽고, 공간은 감정을 억압하며, 그 결과 우리는 누구도 믿지 못하는 방어적 인간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4. 도시는 왜 감정을 고립시키는가

서울은 수백만 명이 모여 사는 도시다. 하지만 《타인은 지옥이다》 속 서울은 철저히 '고립의 도시'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모두 이어폰을 꽂고 다니며,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종우는 오히려 더 외롭고, 더 불안하며, 점점 타인을 믿을 수 없는 인간이 되어간다.

현대 도시의 가장 큰 공포는 무엇일까? 그것은 낯선 사람의 위협일까? 범죄일까? 고립된 주거환경일까?

《타인은 지옥이다》는 말한다.
가장 큰 공포는 ‘불신이 정상화된 세계’에 적응해 버린 나 자신이라고.

결론: 우리는 모두 하나씩의 고시원을 안에 품고 살아간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타인의 공포를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내면의 감정, 인식, 해석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때로 너무 쉽게 타인을 이상하게 여기고, 이유 없이 경계하고, 피하고, 비난하고, 혐오한다. 그러나 그 감정은 어디서 오는가?

타인이 나를 위협하기도 하지만, 더 자주 나는 타인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지점에서 지옥은 만들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옥 속에서 타인을 의심하며 살고 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타인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