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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와 인간 중심주의의 붕괴 (존재의 위계, 타자의 얼굴, 생명의 권리)

by luby0211 2025. 7. 8.

영화 옥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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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는 슈퍼돼지 옥자와 소녀 미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 안에는 깊이 있는 철학적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동물 보호 메시지를 넘어서, 인간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존재 위계, 동물의 타자성, 생명의 권리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는 왜 어떤 생명은 ‘먹을 수 있는 것’이 되고, 또 어떤 생명은 ‘지켜야 할 존재’가 되는가? 《옥자》는 이 질문을 통해 인간과 동물, 생명과 소비 사이의 경계를 철학적으로 재조명합니다.

인간 중심주의와 존재의 위계: 왜 인간이 기준이 되는가

서구 철학의 오랜 전통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하며, 동물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위치시켜 왔습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감정 없는 기계'로 간주했고, 칸트는 동물에게 도덕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철학사 전반은 인간 중심주의를 기초로 해왔습니다.

《옥자》는 이 위계의 틀을 정면으로 해체합니다. 옥자는 지능과 감정을 지닌 존재이며, 미자와는 언어 이상의 정서적 유대 관계를 형성합니다. 영화는 반복해서 관객에게 묻습니다. “이 존재는 단지 식량인가, 아니면 인격적 관계의 주체인가?”

인간은 동물 중 하나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을 도덕적 판단의 중심에 놓고 모든 생명을 수단화합니다. 철학자 피터 싱어는 『동물 해방』에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도덕적 고려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옥자는 고통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는 단순한 ‘가축’이나 ‘식자재’라는 말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옥자》는 인간 중심적 위계 구조가 얼마나 임의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며, 생명 존재 간의 수평적 윤리로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타자의 얼굴: 동물은 타자인가, 대상인가?

미자의 입장에서 옥자는 ‘가축’이 아닙니다. 함께 성장한 친구이자 가족이며,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하지만 세계 식품 기업 미란도는 옥자를 상품화하고 객체화합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인간 윤리의 시작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 얼굴이 말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나에게 도덕적 요청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옥자의 눈은 단순한 동물의 눈이 아닙니다. 고통, 두려움, 신뢰, 슬픔이 담긴 존재의 ‘얼굴’입니다.

레비나스의 사유에 따르면, 진정한 윤리는 타자를 객체화하지 않고, 타자의 타자성 자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옥자》는 인간이 동물에게서 ‘얼굴’을 보지 못할 때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실험실 장면은 극단적으로 타자성을 말살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옥자는 더 이상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수치화된 유전자, 무게, 효율로 바뀌게 됩니다. 이는 존재의 얼굴이 지워진 자리에서 어떤 윤리도 존재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생명의 권리: 먹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옥자》는 우리 사회가 생명을 선택적으로 존중하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꼬집습니다. 개는 반려동물로 사랑하면서도 돼지나 소는 기계적 시스템 안에서 길러지고 도축됩니다. 인간은 이를 "자연의 질서"로 포장하지만, 영화는 “그 질서는 누가 만들었는가?”를 묻습니다.

우리는 어떤 동물은 ‘먹을 수 있다’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자연이 아니라 문화와 경제, 산업에 의해 구성된 것입니다. 영화 속 슈퍼돼지는 인간이 ‘디자인’한 생명이며, 오직 ‘맛있게 먹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는 생명을 본질적으로 수단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동물 윤리학자 톰 리건은 동물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삶의 주체’라고 주장하며, 고유한 삶의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옥자는 그 자체로 고유한 기억, 감정, 욕망, 공포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는 단지 ‘생산물’이나 ‘먹거리’가 아닌, 살아있는 개체로서의 권리를 가집니다.

미자가 옥자를 되찾기 위해 몸을 던지는 순간은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존재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한 윤리적 선언입니다. 영화는 이 선언이 거대한 시스템을 무너뜨리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의미 있는 저항이자 사유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옥자》는 인간과 동물, 주체와 객체,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사이의 위계 구조를 흔들며, 인간 중심주의의 해체를 철학적으로 시도하는 작품입니다. 우리는 무심코 타자를 수단화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타자가 고통을 느끼고, 관계를 형성하며, 존재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는 단순히 식품 산업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 우리 식탁 위에, 일상 속 선택 앞에 여전히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