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인류 보편의 주제지만, 영화는 그것을 단순히 감정이나 이벤트가 아닌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 영화들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근원을 되묻게 하며, 철학이 던지는 질문에 감성적으로 접근하게 합니다. 본 글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삼은 대표적인 철학적 영화 세 편 — 『비포 선라이즈』, 『그녀(Her)』, 『이터널 선샤인』 — 을 통해 에로스, 아가페, 존재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사랑을 사유해봅니다.
에로스: 『비포 선라이즈』와 낯선 끌림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여행 중 우연히 만난 남녀가 하루 동안 오스트리아 빈을 거닐며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에로스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말하는 '결핍에서 비롯된 갈망'으로 정의되며, 단순한 성적 충동을 넘는 존재로의 상승 욕구를 포함합니다. 이 영화에서의 사랑은 바로 그 에로스적 본능을 가장 순수하게 그려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과거도 없고 미래도 불확실한 상태에서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육체적 결합보다 ‘대화’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는 사랑이 단순한 감각적 자극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질문이자 내면의 결핍을 향한 타자와의 소통임을 보여줍니다. 에로스는 단순한 욕망이 아닌, 더 나은 자아로 나아가고자 하는 철학적 움직임이며, 영화는 이를 감각적으로 풀어냅니다.
아가페: 『그녀(Her)』와 무조건적인 사랑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Her)』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 외로운 남자 테오도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작품은 인간과 AI 사이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되묻게 합니다. 사만다는 육체가 없고, 언제나 존재하며, 조건 없이 테오도르를 이해하려 합니다. 이는 철학적 개념인 ‘아가페’ — 조건 없는 사랑 — 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가페는 헬라어로 신이 인간을 사랑하듯, 이기심 없는 희생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테오도르가 느끼는 감정은 사만다의 외형이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고, 그 존재 자체에 향합니다. 사만다는 인간적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비인간성 속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사랑은 무엇을 기반으로 성립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신체? 상호작용? 아니면 감정 그 자체? 사만다는 수많은 사람과 동시에 사랑에 빠질 수 있지만, 그 개별적 진심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랑이란 결국 ‘소유’나 ‘독점’이 아닌 ‘이해’와 ‘존중’의 감정임을 말해주는 이 영화는 아가페적 사랑이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가능한가를 묻습니다.
존재: 『이터널 선샤인』과 기억 너머의 사랑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은 헤어진 연인들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워가는 과정을 그리며, 사랑과 기억, 존재 사이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풀어냅니다. 기억을 잃으면 사랑도 사라질까? 존재하지 않는 기억은 사랑의 흔적을 지우는가?
하이데거는 인간을 ‘기억과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라 했습니다. 기억은 곧 존재의 일부이며, 사랑의 연속성 역시 그 기억 위에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기억조차 없애버린 이후에도 사랑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암시합니다.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잔재를 남깁니다.
극 중에서 주인공 조엘은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 속에서도 사랑의 순간들을 다시 경험하며, 그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저항을 보여줍니다. 이는 사랑이 단지 기억의 결과물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로 존재함을 뜻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존재론적 질문 — “나는 누구이며,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나를 구성하는가?” — 에 도전합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대상입니다. 『비포 선라이즈』는 에로스를, 『그녀』는 아가페를, 『이터널 선샤인』은 존재 그 자체로서의 사랑을 보여주며,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감정보다 더 깊은 차원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철학과 영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고, 또 사유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