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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철학 (존재, 시간, 윤리)

by luby0211 2025. 7. 7.

영화 덩케르크 포스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는 2차 세계대전의 실화를 바탕으로 전쟁의 공포와 생존의 본능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순한 전쟁영화로 끝나지 않고, 깊은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합니다. <덩케르크>는 인간 존재, 시간, 윤리, 공동체성의 문제를 묵직하게 던지며 현실 전쟁과 철학적 전쟁 인식 사이의 간극을 드러냅니다. 이번 글에서는 영화 속 철학적 주제를 중심으로 현실 전쟁과의 차이를 비교 분석해 보겠습니다.

전쟁 속 인간: 영웅주의가 아닌 '존재'로서의 인간

<덩케르크>는 일반적인 전쟁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영웅주의나 애국심의 과장된 표현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주인공은 특정하지 않으며, 관객은 누가 누구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인물들을 평등하게 배치합니다. 이는 인간을 '개인'으로서 강조하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존재’ 그 자체로 드러내려는 철학적 시도입니다. 이런 관점은 실존주의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장 폴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본질보다 먼저 존재하며,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갑니다. <덩케르크> 속 병사들은 영웅이 되기 위한 행동이 아닌, 단지 살아남기 위해 행동합니다. 그들의 선택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본능적이며 때로는 이기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다움’이 가장 진실되게 드러납니다. 현실 전쟁에서도 우리는 종종 영웅담을 듣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두려움과 공포,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며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영화 <덩케르크>는 이러한 현실을 미화 없이 드러냄으로써, 전쟁에서의 인간 존재를 철학적으로 조명합니다. 이처럼 영화 속 ‘평범한 인간’은 현실 전쟁에서의 ‘이름 없는 병사’와 연결되며, 그 사이의 철학적 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의 철학적 구조와 현실 전쟁의 감각 차이

<덩케르크>는 매우 독특한 시간 구조를 가집니다. 놀란 감독은 ‘육지(1주일)’, ‘바다(1일)’, ‘하늘(1시간)’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교차 편집하여 하나의 사건처럼 엮어냈습니다. 이 구성은 단순한 시간 순서가 아니라, 시간의 체험 방식 자체를 표현하려는 철학적 실험입니다. 이는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지속(durée)’ 개념과 유사합니다. 베르그송은 인간이 체감하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과 다르며, 감정과 경험에 따라 유동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육지의 병사들에게 시간은 고통스럽게 길게 느껴지고, 하늘을 나는 조종사에게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갑니다. 관객 또한 이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이게 되며, 전쟁 상황에서 시간이 얼마나 상대적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반면 현실의 전쟁에서는 시간은 무심하게 흐르지만, 그 안에 있는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체감합니다. 전장에서 1초가 생사를 가르고, 고향에서는 그 1초가 몇 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시간의 철학적 구조를 통해 전쟁을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 아닌, 경험의 총체로 재구성합니다. 현실 전쟁과의 간극은 바로 이 지점—‘객관적 사실 vs 주관적 체험’—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윤리와 책임의 문제: 공동체와 개인의 충돌

전쟁 속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덩케르크>는 이러한 윤리적 갈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배에 먼저 타려는 병사, 구조를 포기한 민간인, 명령과 생존 사이에서 흔들리는 지휘관 등 모든 인물은 윤리적 ‘딜레마’ 속에 놓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책임' 개념과 대비됩니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윤리적 주체가 된다고 보았지만, 전쟁은 그 윤리를 압도하는 환경입니다. 영화는 타인을 살리기보다 나 자신을 살려야 하는 순간,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현실 전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의 현장에서는 윤리적 판단이 ‘사치’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때때로 타인을 위해 희생하거나, 공동체를 위한 결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덩케르크>는 그런 선택들이 어떤 과정과 고뇌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현실과 철학 사이의 윤리적 간극을 드러냅니다. 영화는 단지 전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없는 환경에서 '어떻게 최소한의 인간성이라도 지켜낼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것이 <덩케르크>가 전쟁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방식이며, 현실 전쟁과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덩케르크>는 현실 전쟁의 비극성과 인간 본연의 감정, 그리고 시간과 윤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겹겹이 담아낸 작품입니다. 현실 전쟁이 전략과 전술, 승패에 집중된다면, <덩케르크>는 전쟁 속 ‘존재하는 인간’을 중심에 둡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연출 기법의 차이가 아닌, 전쟁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전쟁을 보도와 기록으로 접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인간의 고통, 판단, 갈등, 생존 본능을 마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덩케르크>는 그 간극을 메우며, 우리가 전쟁을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닌 인간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함을 일깨웁니다. 결국 전쟁은 수치와 결과가 아닌, 인간 존재의 무게로 기록되어야 하며, 그 속에서 철학은 가장 빛을 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