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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고통, 상실, 세계의 윤리에 대하여)

by luby0211 2025. 7. 9.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 포스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는 죽음, 상실, 전쟁, 도피, 성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은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진짜 묻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주인공 마히토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질문은 더욱 철학적으로 확장됩니다. 기억은 존재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상실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리고 한 개인의 선택은 세계의 균형에 어떤 책임을 지는가? 이 글에서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삶의 윤리, 기억의 철학, 세계의 책임에 대해 깊이 있게 사유해 봅니다.

고통 앞에서 삶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시작은 ‘죽음’입니다. 마히토는 어머니를 전쟁 중의 화재로 잃고, 아버지의 새 가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어린 나이지만 마히토는 그 슬픔과 상처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침묵과 무감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모습은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의 상태와 유사합니다. 그는 절망이란 단지 슬픈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로부터 도망치려는 실존의 실패라고 말합니다. 마히토는 스스로 고통을 회피하며, 감정을 억누르고, 현실을 거부하려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도피의 끝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마히토가 환상 세계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수많은 생명과 잔혹한 장면들을 목격하는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내면의 혼돈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히토는 스스로를 시험합니다.

삶은 고통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 없이 얻는 평화는 허상입니다. 마히토가 결국 자신이 겪은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순간, 마히토는 비로소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실존적 주체가 됩니다.

기억과 상실: 우리는 잊지 못할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정보가 아니라, 존재의 기반입니다. 마히토는 어머니를 잃은 뒤, 새로운 환경에서 계속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영화 속 유리탑은 기억의 공간이자, 무너져야 할 환상적 질서의 상징입니다. 유리처럼 투명하지만 깨지기 쉬운 이 공간은, 마히토가 도피 속에서 상실의 고통을 잊고자 만든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또다시 타자의 고통과 마주합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시계로 재는 물리적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지속’, 즉 감정과 의식 속에서 흐르는 시간입니다. 마히토의 삶은 외적으로는 계속 움직이고 있지만, 그의 내면은 상실의 순간에 정지해 있습니다.

그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품은 채로 미래를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영화는 이를 환상적 메타포를 통해 보여줍니다. 상실은 끝이 아닙니다. 기억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잊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구조물입니다.

한 사람의 선택, 한 세계의 윤리: 나는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가장 철학적인 질문은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마히토에게 유리탑의 ‘왕’은 말합니다. “이 세계를 너에게 물려주겠다.” 그 세계는 정돈되어 있고, 이상적이며, 완벽히 균형 잡힌 구조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정지된 삶, 무력한 존재, 결정된 미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 장면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과 정치적 책임’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본질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봤습니다. 마히토는 기존의 세계를 계승하는 것보다, 자신이 살아갈 세계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는 윤리적 결단입니다. 세계는 우리가 만든 것이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 따라 지속되거나 무너집니다. 마히토는 어머니를 잃었지만, 새어머니와 함께 ‘다시 살아가기로’ 합니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귀환이며, 책임이며, 세계에 대한 윤리적 응답입니다.

그가 받아들이는 세계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 세계를 선택하고 살아가겠다는 태도 그 자체가 윤리적 균형을 회복하는 출발점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삶, 죽음, 고통, 기억, 선택이라는 복잡한 감정과 철학의 층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상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세계의 일부를 물려받고, 또 다른 세계를 물려줄 존재가 됩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고통을 직면하고, 어떤 기억을 간직하며, 그 기억 속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 가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물음은 누군가의 질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가 던져야 할 자기 철학의 시작점입니다.